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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 이야기
엄마 감정의 본질, 파헤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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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의 대물림이란 말은 육아계에서 하나의 '업계 용어'처럼 되어 있다. 자식이기도 한 부모의 애착 유형은 결국 자녀에게 또 대물림이 될 확률이 높으니 자기성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교과서적인 답안이기도 하다.

책이나 다큐멘터리, 각종 육아 멘토링 등에 나와서 이젠 새로울 것도 없는 양육의 대물림,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제시하는 가이드는 모두 옳은 말 같으면서도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주로 다음과 같은 상황이 대물림이 일어나는 현장이라 생각하기 쉽다.

1) 나의 어머니는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린 나를 보듬어주고 감정적으로 지지해주기는커녕 잘못하면 '넌 누굴 닮아 이러니?'라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자존감도 낮아졌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2) 내 아이에게는 엄마같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엄마처럼 하면 어쩌나 싶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애착이 어쩌고 대물림이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될 것만 같다.

3) 사실 엊그제에도 아이가 말을 안 듣고 떼를 썼다. 아이라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나서 순간 '안 그러다가 왜 이래? 엄마가 이러라 했어?!'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눈에 순간 두려움과 슬픔이 언뜻 비쳤다. 나도 모르게 엄마처럼 하고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경우는 대표적인 형태의 대물림의 현장이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하는 것. 하지만 이것만이 대물림이 아니다. 이것은 드러나는 여러 가지 양상 중 하나일 뿐이다. 뭘 하느냐 마느냐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집중을 하면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라는 매뉴얼적인 가이드가 위험한 이유다. 근본적인 것에는 닿지 못하면서 표면적인 행위 몇 가지만을 교정하는 것은, 붕대 위로 피가 스며나오는데 상처 부위를 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붕대를 덧대어 피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슈타이너도 지금 차원의 문제는 더 상위의 차원에서 보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현실의 물질(육체) 계에서의 문제는 감정 차원에서, 감정 차원에서의 문제는 정신/영적 차원에서 조망하여야 해결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내가 평소에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댄다면, 단순히 육체의 기능이 고장 난 것만이 아니다. 감정생활을 돌아보면 그 몸의 고장을 유발한 원인이 있다. 나는 화를 억누르고 살거나 늘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성, 신경성 질환이라는 말은 감정 차원의 문제가 몸에 나타난 것에 대해 의학적인 설명을 찾지 못 해서 붙인 이름이다.

내 감정은 왜 그렇게 불안한가? 일상에 아무런 일이 없어도, 내 무의식은 늘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날 할머니 댁에 날 버려두고(아이의 시각) 가셨기 때문이다. 내 무의식의 결핍은 평소의 감정에 영향을 미쳐 남과 같은 것을 봐도 '버려지고 싶지 않음'의 스위치부터 켠다. 그러나 지금 나는 버려졌는가? 그건 과거의 어느 때의 경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일어나고 이에 휘둘리는 것은, 그만큼 내 무의식의 힘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붕대 밑의 상처가, 바로 이 무의식이다. 양육의 대물림을 일으키는 것도 무의식이다. 내 무의식에 새겨진 결핍이 내 감정을 이끌고, 이것이 내 행동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엄마로서 대물림을 끊고 싶다면 내 무의식에 새겨진 결핍감이 튀어나오는 순간순간을 캐치하여,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건 내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들러붙어 영향을 주는 것일 뿐이야'라고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엄마와 같은 대사, 행동을 하고 있다'라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이 된다. 그럼 결핍감이 드러나는 것, 그것도 무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라 말 그대로 '무의식중에'하는 내 생각이 나 행동 속 결핍감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우선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다. 여러 개일 수도 있지만 시작은 하나여도 좋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내 키워드는 [혼자 참는다]이다. 내가 가진 결핍은 엄마의 무관심으로 혼자 모든 것을 해내고 내 욕구를 뒤로 숨겨 늘 참는 것, 나만 양보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영향을 미쳐 아직도 '나만 참고 양보하는 것 같을 때=나의 힘듦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 때'에 감정이 울컥 뒤집어진다.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유아적이지만, 결핍감은 그렇다.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에 새겨진 무의식적 결핍감이라 속성이 그렇다. 이걸 인정하기 싫어하면 시작조차 안된다. 가련하게 난 상처만 받은 피해자에요-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나만 중요하고 나만 생각하던 시선으로 본 결핍감 그 자체를 순수하게 인정하고 내 키워드를 뽑는다. 점잖을 필요도, 고고하고 교양 있을 필요도 없다.

키워드를 찾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다음 스텝은 일상에서 '내'가 영향받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감정이 일렁이며 불쾌해질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된다. (대부분은 감정적으로 대응한 후에 생각해보지만, 알아차림 연습을 하고 싶다면 울컥하는 순간 잠시 심호흡을 하고 적용해볼 수도 있다)

'지금 <또 혼자만 참는다고 생각해서> 울컥한 거야?' 하고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온다. Yes인 경우, 내 무의식적 결핍에 휘둘린 것이다. 상황이 정말 내가 또 양보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황을 과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다. 무의식적 결핍은 상황을 과대해석하고 과잉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 진정하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다음번에는 보다 스스로를 주시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사람이 차분해진다.

그다음 스텝은 아이에게 '투사'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전 단계가 안되면 이 투사 알아차리기는 더욱 안된다. 그래서 부모의 자기성찰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부모 탓이라며 해결하기 어려운 아이의 문제를 얼렁뚱땅 덮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로 부모의 무의식->아이의 무의식으로 대물림이 되기에 그렇다. 대개의 가이드는 부모 상처를 치유하고 아이에게 공감해주라며 행동 법을 알려준다. 치유받은 힘으로 '바른 행동'을 하려고 힘쓰라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해와 위안의 힘을 알면서도 이것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는 현실 또한 알고 있다. 전보다는 낫지만 잘 되지 않으니 또 책을 찾고 다큐멘터리를 본다. 나는 그랬다.

아무튼, 찾았던 내 결핍 키워드를 들고 아이를 본다. '나는 혼자 해내야 했던 게 서러웠어. 내 아이는 그런 서러움을 안 느끼게 할 거야'라는 관념이 내 머릿속에 있다.

나의 아이는 소위 '순한' 아이다. 필요할 때 간결하게 울음으로 의사표시를 하는데, 조금 불편하다고 빽빽 우는 게 아니라, 얼마간 시간이 지날 때까지 있다가 조금씩 울기 시작한다. 똥 기저귀가 차도 방싯대고 웃다가 칭얼대며 불편을 호소하고, 주사를 맞아도 씩씩하게 참고 맞고 조금 울고 만다. 나는 아이를 보면서 짠한 연민을 느끼고 더 세심히 보려고 한다.

위의 과정은 문제없는, 아름다운 엄마의 마음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결핍으로 인한 투사가 진하게 묻어 있다. 난 이미 아이가 '힘들어도 참는 씩씩한 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지만, 수더분하고 다소 둔한, 세상 편하게 사는 타입일 수도 있다. 똥 기저귀도 주사도 별로 안 불편하고 할만해서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해내는 것은 불쌍해! 불쌍한 어린 시절의 나!'란 결핍감을 간직한 나는 아이의 반응을 불쌍함과 연결한다. 완벽한 자기 투사다.

엄마가 내게 한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훌륭하지만, 이 또한 다른 형태의 '반전된 대물림'의 시초가 될 수 있다. 나는 엄마와 달리 아이와 딱 붙어 있을 거야, 혼자 하게 하지 않을 거야-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함께 하려 하는 숨 막히는 엄마의 행동을 하게 된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러다가 아이가 이를 거부하면, '나는 이렇게 잘 해주는데 네가 거부하다니 서운하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내세워 아이와 대치하다 보면, 아이는 형태만 반대로 보일 뿐 똑같이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된 느낌'을 받는다. 모든 대물림은 이렇게 일어난다. 부모가 무의식에 휘둘려서 하는 행동이 아이의 무의식에 악영향을 주게 되는 게 대물림이다. 부모와 같은 행동을 아이에게 하는 게 대물림의 본질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라 본인이 깨닫기도 어려운데, 겉으로는 좋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더더욱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내가 못 먹고 없이 자랐으니 아이에게만은 좋은 걸 먹이고 입히겠다며 고급 유모차부터 시작해서 온갖 브랜드의 무언가를 공급하며 좋은 엄마라 여기고 있진 않은가? 내가 야단 맞고 자라 주눅이 들었으니, 아이만큼은 감싸 안고 싶다며 오냐오냐하느라 버릇이 나빠지는 것이 걱정인가? 내가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 외로웠으니 모든 순간에 아이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하진 않는가?

좋은 의도로 시작된 행동이라도, 결핍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은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아이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 투사를 거두어야 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투사를 거두고 모범적인 행동만을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결핍감이 무엇이고, 언제 등장하는지만 알아차려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판타스틱 듀오라는 TV 프로그램에 양희은 씨가 나와 악동 뮤지션과 <엄마가 딸에게>라는 곡을 불렀다.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내 투사를 바탕으로 하여 아이에게 필요한 걸 찾으려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아이가 자기 삶을 살 수 있게 믿고 따스한 지지를 보내면 된다. 이렇게 주절주절 적은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노래에 모든 게 담겨 있다. 머리로 대물림의 본질을 보고 알아차리는 방법을 이해했다면, 가슴으로 노래를 듣고 모든 아들딸인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뭔지 느껴보길 권한다. 그리고 의지를 내어 실천하면, 이것이 곧 자기성장의 육아가 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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